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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정치, 교육

국민의힘 비례 1번 최보윤 변호사, 2번 박충권 연구원 프로필 학력 나이 고향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4. 3. 18.

목 차

 

최보윤 변호사 프로필

최보윤 변호사 프로필

 

최보윤 변호사의 프로필은 다음과 같습니다:

- 직업: 손해배상 전문 변호사
- 학력: 서울대학교 법학과 졸업
- 나이: 1978년생 (현재 46세)
- 고향: 서울
- 경력 :
  - 사법연수원(41기) 수료
  - 법무법인 태신 변호사
  - 성남시 장애인권리증진센터 무료 법률자문 및 소송구조
  - 한국척수장애직장인협회 회장
  - 법무부 인권정책자문단 자문위원
  - 법무부 장애인차별시정심의위 위원
- 수상 : 올해의 장애인상

최보윤 변호사는 교통사고, 의료사고, 산업재해 등의 사건을 주로 다루며, 장애인 인권 향상을 위한 활동에도 열정적입니다. 사법연수원 재직 중 의료사고로 인한 장애를 겪은 후, 장애인 법률 구조에 기여한 공로로 '올해의 장애인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의 경험은 장애인의 어려움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한 법적 지원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관련된 후보자 인터뷰를 첨부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법률가의 길을 꿈꿔온 그가 이런 활동을 하게 된 배경엔 뜻하지 않게 찾아온 장애가 있었다. 제51회 사법시험 합격 후 사법연수원(41기) 재직 중 당한 의료사고의 여파로 휠체어에 올라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장애인 법률 구조에 힘쓴 공로로 ‘올해의 장애인 상’을 받았다. 8월 30일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장애로 인해 오히려 법조인으로서 활동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손해배상 전문을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2년간 병원 생활을 하면서 주변 환자들의 사례를 보게 됐어요. 연수원에서 배운 대로라면 그렇게 합의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불충분한 설명만 듣고 합의 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안타까웠고 그런 분들께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법리적으로 어렵거나 노력을 좀더 들여야 하는 사건을 많이 맡는 편이에요. 몸은 힘들어도 ‘더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장애가 생기면 복합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법적인 도움 외에도 의뢰인 당사자의 심리적인 어려움과 가족들의 어려움까지 헤아려야 하는데, 자신이야말로 그런 ‘토털 서비스’가 가능한 것 같다는 설명. 이 또한 의료사고 피해자로서 소송을 진행했던 경험이 도움이 됐다.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기 전 의뢰인 입장에서 소송을 준비하면서 간단한 확인서를 적어내는 것도 누군가에겐 어려울 수 있음을 알았다. 변호사가 된 지금은 ‘나는 무엇이 필요했더라’ 되짚어 보고 의뢰인들에게 샘플 하나라도 더 다양하게 제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장애가 생기면 노동력 상실률이나 필요한 보장구, 치료비 등에 대한 감정을 토대로 법원이 판결을 내립니다. 조금이라도 더 세심하게 봐드리고 판사님께 어필하려 하죠. 무엇이 필요한지 제가 알고, 먹는 약과 가격도 아니까 더 꼼꼼히 챙기게 돼요. 법 관련 업무는 아니지만 얼마 전엔 의뢰인에게 필요한 보조구를 만들 수 있도록 연결해 드리기도 했어요.”
장애와 관련된 사건 진행은 의뢰인과 변호사 모두에게 쉽지 않다. 사고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의뢰인에겐 고통스럽고, 신체감정과 진료기록 감정 등의 절차가 있어 길고 지난한 소송 과정을 함께해야 한다. 그래도 힘들어하던 의뢰인의 심정에 변화가 보이고 억울한 마음이 풀려 홀가분해지는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판결은 경제적인 배상 면에서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풀어드린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사고를 당하고 싶은 사람은 없거든요. 왜 사고가 났고 내가 정말 잘못한 것인지 납득이 돼야 하는데 법원이라는 공적인 기관의 판단을 받게 되는 거예요. 그 내용이 평생 남는 것인 만큼 후회가 없게 해드리고 싶어요.”

 

박충권 연구원 프로필

박충권 연구원

 

박충권 연구원의 프로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출생연도: 1986년
- 출생지: 함경남도 함흥, 북한
- 학력:   
  - 평양 김정은국방종합대학교 화학공학 학사
  - 서울대학교 재료공학 석사 및 박사
- 경력: 
  - 북한 대량살상무기연구소 근무
  - 서울대학교 재료공학연구소 연구원
  - 현대제철 연구개발본부 책임연구원 (2018년부터)
- 정치 활동: 
  - 국민의힘 영입인재
  - 남북관계 및 한국 소재산업 발전에 관심
  -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칼럼 게재
  - 정치 입문을 통한 사회 기여 의지 표명

박 연구원은 북한에서의 엘리트 교육을 받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관여했습니다. 그러나 북한 체제의 위선을 깨닫고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한국에 정착한 후 서울대학교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현대제철에서 자동차 부품소재 연구를 담당했습니다. 정치에 입문하여 한국의 산업발전과 대북정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의 기업 규제 완화와 노동 시장 개혁을 주장하며, 탈북민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박충권 연구원

 

박 연구원은 1986년 함흥냉면으로 유명한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땐 열심히 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특히 공부도 열심히 해 북한에서도 엘리트만 간다는 평양 김정은국방종합대학교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여 졸업 후 북한 대량살상무기연구소에서 근무하며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과정에 관여했습니다. 

 

다만 엘리트코스를 달리던 그는 북한의 체제 자체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북한의 체제를 알리고 고취시키는 일을 하면서 진정으로 북한 주민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나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굉장히 깊은 고뇌에 빠졌고 김정일이 직접 쓴 사회주의와 관련한 논문도 2개나 읽으면서 의문을 풀어볼까 했지만, 논문에 담긴 너무나도 많은 오류에 회의감은 오히려 더 커져만 갔습니다.

회의감은 곧 의심과 분노로 변했습니다. 박 연구원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공할 수 없는 북한 체제의 실상을 마주했고, 동시에 모든 믿음이 깨졌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24살이란 나이에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북한이라는 거대한 감옥을 벗어나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2009년 4월 북한이 은하2호 시험발사에 성공한 날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빠져나왔고, 중국 단둥을 거쳐 인천항을 통해 우리나라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리고 박 연구원은 서울대학교에 들어가 재료공학 석·박사 과정을 마쳤으며 2018년엔 국내 굴지 대기업인 현대제철에 입사해 연구개발본부에서 자동차 엔진·변속기·파워트레인용 부품소재를 연구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현실정치에 발을 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건은 바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었는데, 박 연구원은 국방대학교를 다니면서 누구보다도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북한에 지원한 자금이 핵무기 개발에 투입되는 사실을 지근거리에서 목격했고 이 때문에 북한 인민의 삶은 더 궁핍해졌고 북한의 무력은 더 강해졌는데, 이 같은 일이 한국으로 넘어온 다음에도 재발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견디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박 연구원은 대북정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칼럼을 한 언론에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를 아꼈던 지도교수는 박 연구원에게 절대 눈에 띄는 활동을 않겠다는 각서를 받을 정도로 그의 정치개입을 막았지만 그럼에도 박 연구원의 눈과 마음은 정치로 쏠렸습니다. 그런 상황을 알았던 듯 국민의힘이 적절한 시기에 박 연구원에게 영입제안을 했고, 그는 이를 수락하면서 현실정치에 몸담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박 연구원은 "탈북할 때도 '혼자 잘먹고 잘살자'는 생각으로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 고민 끝에 (정치 입문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운명이라면 '정면돌파 해보자. 정치를 통해서 사회에 기여하는 역할을 해보자' 이런 생각이 들어 입문을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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