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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e

일본 견당사 출신의 당나라 관료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 698?~770) 생애 업적 와카

by 지식과 지혜의 나무 2024.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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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 698?~770)는 일본 나라 시대(奈良時代)의 견당유학생(遣唐留学生)으로서, 평생 동안 당(唐) 조정에서 활약하고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비운의 귀족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다는 평을 들었고, 후일 중국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했을 정도로 학문과 문예 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한·중·일 삼국의 문인들과 깊이 교류하였으며, 이백(李白), 왕유(王維) 등 당대 최고 시인들과 서로 시를 주고받았습니다. 일본에서는 그가 남긴 와카(和歌)가 『백인일수(百人一首)』에도 채록되어 전하며, ‘고향 땅의 미카사산(三笠山)을 그리워하는 달’이라는 이미지로 유명합니다. 본문에서 언급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그의 문학,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아베노 나카마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길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출생과 집안 배경
1. 출생 연도

• 《古今和歌集目録》에 따르면 701년에 태어났다는 설이 있으나, 전통적으로는 698년 출생설이 유력합니다.
• 『続日本紀』에는 대략 8세기 중반 이후 그의 행적이 부분적으로 언급되어 있으나, 정확한 생몰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약간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2. 가계

• 아버지는 중무대부(中務大輔)로 알려진 아베 후나모리(阿倍船守)이며, “아손(朝臣)” 가문에 속합니다.
• 조부는 스쿠이(筑紫, 지금의 후쿠오카 인근) 지역의 행정을 맡았던 다자이후(大宰帥) 관리였다고 합니다.
• 형제 중에는 아베 오비마로(阿倍帯麻呂)가 있었고, 일부 전설류 문헌에는 “아베 후나모리의 차남이자 ‘요시네(好根)’라는 형이 따로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3. 성장 배경

• 태어난 곳은 야마토(大和国, 지금의 나라현 인근)로 추정됩니다.
•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 “영재(英才)”라는 평판이 있었고, 왕실 및 귀족사회가 그의 재능을 주목하게 됩니다.

2. 견당사(遣唐使) 파견과 유학
1. 견당사 제9차 파견(717년)

• 레이키(霊亀) 3년(717)~요우로우(養老) 원년(같은 717년에 연호가 바뀜)경, 타지히노 아가타모리(多治比県守)가 대사(大使)로 이끈 제9차 견당사 편에 동행하여 당으로 건너갑니다.
• 같은 배를 탄 동행 유학생으로 기비노 마키비(吉備真備), 승려 현방(玄昉)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일본으로 돌아가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2. 당나라 유학 생활


• 수도 장안(長安)의 태학(太学)에서 학업을 이어갔으며, 문학과 경전, 역사, 율령법 등 여러 분야를 광범위하게 공부했다고 전해집니다.
• 과거(科挙) 급제에 대한 기록은 여러 설이 있으나, 전통적으로 그가 과거에 합격해 높은 수준의 문학·정무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여깁니다.
• 『続日本紀』에서는 아베노 나카마로와 기비노 마키비, 이 둘만이 “일본에서 유학 갔으나 당국(唐国)에서 이름을 높였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3. 당 조정에서의 벼슬길
1. 초기 관직과 문학 활동

• 725년, 낙양(洛陽)의 사경국교서(司経局校書)를 시작으로, 728년에는 좌섭견(左拾遺), 731년에는 좌보궐(左補闕) 등 문한(文翰)을 담당하는 관직을 잇따라 역임했습니다.
• 이러한 행정·문화 분야 활동 덕분에 당나라 조정의 문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맺게 되었고, 특히 왕유(王維), 이백(李白), 저광의(儲光羲) 등과 시문(詩文)을 주고받았습니다.

2. 고위 관직으로의 승진

• 당의 현종(玄宗)은 그의 문학적 재능과 관리로서의 자질을 높이 사서 점차 승진시킵니다.
• 733년,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었던 10차 견당사가 귀국길에 올랐으나, 아베노 나카마로는 귀국을 포기하고 당 조정의 관직 길을 계속 택했습니다.
• 이후 여러 차례 높은 벼슬을 받았는데, 예를 들어 진남도호(鎮南都護)·안남절도사(安南節度使)로 발령받아 베트남(당시 안남)의 통치를 맡기도 했습니다. 당시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의 위치는 지금의 베트남 하노이 일대였고, 이곳에서 약 6년간 재임하면서 지역 행정을 책임졌습니다.

3. 귀국 시도의 실패와 안록산의 난(755년)

• 752년에는 제12차 견당사 일행이 내당(來唐)하였고, 대사藤原清河(후지와라노 기요카와) 등과 함께 753년경 귀국을 시도합니다. 이때 당 조정으로부터 비서감(秘書監), 위위경(衛尉卿)이라는 직함도 받았습니다.
• 그러나 귀국선이 폭풍을 만나 베트남 중부 지역(환주驩州) 쪽으로 표류하는 바람에, 뜻대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 한편 755년 안록산의 난(安禄山の乱)이 발발하면서, 장안(長安)까지 전쟁의 불길이 번지게 됩니다. 이 혼란 속에서도 아베노 나카마로는 당 조정의 중신으로서 자리를 지켰고, 끝내 귀국을 단념합니다.

4. 최후와 사후

• 나중에는 노주대도독(潞州大都督)까지 올랐다는 기록이 있으며, 770년(일본 연호로 보자면 보키(宝亀) 원년), 70대 나이로 당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 『続日本紀』에는 그가 죽은 뒤, 가족이 가난해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다는 소식을 일본 조정이 듣고 비단과 포목을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 생애 말년까지도 일본 땅을 그리워했으나, 결국 바다를 건너 귀국할 수 없었던 점이 후대인들에게 큰 안타까움을 남겼습니다.

4. 문학·예술적 업적
1. 와카(和歌)

• 일본어로 된 시가(和歌) 역시 그가 남긴 문헌이 전해지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에 실린 아래의 노래입니다.
天の原 ふりさけ見れば 春日なる
三笠の山に いでし月かも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니, 고향 나라(春日)의 미카사 산 위에 떠오른 달이여)

• 『백인일수(百人一首)』 6번으로도 널리 알려진 작품입니다.
• 이 노래가 언제 어디서 지어졌는지는 여러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귀국길 송별 연회에서 일본을 그리워하며 읊었다”고 전합니다.
• 또 다른 설에서는 “당으로 건너가기 직전, 일본 해안을 떠나며 뒤돌아본 ‘미카사산의 달’을 노래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2. 한시(漢詩)

• 『전당시(全唐詩)』 권732에 아베노 나카마로(당명 朝衡)가 지은 오언배율(五言排律) 「銜命還国作(명령을 받아 돌아가며 짓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 당대 최정상 시인들이 그를 위해 시를 지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왕유(王維)는 “送秘書晁監還日本國”이라는 송별시로 나카마로를 전송하였고, 나카마로는 이에 화답하는 시를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 이백(李白)은 나카마로가 난파로 사망했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 「哭晁卿衡」이라는 칠언절구를 지었습니다.
日本晁卿辭帝都
征帆一片遶蓬壺
明月不歸沈碧海
白雲愁色滿蒼梧

• (일본의 晁卿[나카마로]이 장안을 떠나, 돛단배 한 척이 봉호(蓬壺)를 감도는구나.
밝은 달은 돌아오지 못하고 푸른 바다에 가라앉았으며, 흰 구름은 서글픈 빛으로 창오(蒼梧)를 가득 메우네.)
• 이 시는 “명월(밝은 달)”이 결국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나카마로를 상징한다고 해석됩니다.

5. 전설과 설화
1. 『吉備大臣入唐絵巻』, 『安倍仲麿入唐記』 등

• 일부 문헌에는 나카마로가 양국충(楊国忠)과 안록산(安禄山)의 모함을 받아 고루(高楼)에 유폐되고, 원통한 죽음을 맞이한 뒤 귀신이 되어 당을 떠돌았다는 다소 극적이고 민간설화적인 이야기가 전합니다.
• 또 다른 전설에선, 일본 조정이 내린 ‘금오옥토집(金烏玉兎集)’을 빌려 오라는 칙명을 수행하기 위해 당에 갔으나 돌아오지 못했다, 혹은 만게쓰마루(満月丸)라는 아들이 있어서 훗날 아베노 세이메이(安倍晴明)의 선조가 되었다는 등의 전승도 있습니다.
• 이는 기록상 사실과는 많이 다르지만, 나카마로의 ‘비극적 타향 생활’을 극적으로 포장해 후대에 전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2. 일본 조정에서의 역신(逆臣) 취급?

• 일설에 따르면 일본 조정에서 “나카마로가 당에서 너무 높이 출세하여 황제의 칙령을 저버렸다”고 오해하여 역신(逆臣)으로 몰았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 다만 이것은 민간 설화적 요소가 강하며, 『続日本紀』에는 오히려 그의 사후에 일본에서 비단과 포목을 보내 장의를 돕는 등 호의적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6. 동시대 다른 동아시아 인물과의 비교
1. 고선지(高仙芝)

• 고구려 출신으로 당 현종 시기에 서역(西域)에서 전공을 세운 명장이며, 나카마로와 유사 시기에 당 조정에서 활약했습니다.
• 안록산의 난이 발발하자 당군 부원수(副元帥)로서 반란군을 막았으나, 모함에 휘말려 처형당하는 비극을 겪습니다.
• 두 사람 모두 외국 출신으로 당에서 크게 활약했다는 공통점이 있어, 서로 교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2. 혜초(慧超)

• 신라 출신 승려. 인도로 가서 불교 밀교를 배우고, 4년간 인도 순례를 한 뒤 장안(長安)에 머물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습니다.
• 혜초 역시 당 조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었고, 역동적인 8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적 승려’였습니다.

3. 기비노 마키비(吉備真備), 현방(玄昉)

• 나카마로가 유학 갔던 시기에 동행했던 일본 동료 유학생들.
• 귀국 후 현방은 승려로서 조정에서 활약했고, 기비노 마키비는 측천무후, 현종 등 당시 당나라의 정치·문화 제도를 연구해 돌아와 일본의 율령 제도를 정비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 반면 나카마로만은 끝내 당에 남았고, 그 점이 그의 생애를 이들과 구분 짓는 특징입니다.

7. 역사적 의의와 평가
1. 나라 시대 ‘견당사’의 최고 성과

• 일본은 630년 처음 견당사를 파견해 대체로 20년 주기로 사신을 보냈습니다(894년에 공식 중단).
• 아베노 나카마로는 과거 급제 여부를 떠나, 타향에서 당 조정의 핵심부까지 올라간 드문 사례였습니다.
• 이 점에서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 일본인이 이룬 가장 이른 시기의 최고 성공’ 사례로도 꼽힙니다.

2. 문화 교류의 상징

• 이백, 왕유 등 당대에 손꼽히는 문인들과 친분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8세기 동아시아 문학 교류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줍니다.
• 그는 일본 시가(和歌)와 당의 한시 문화 양쪽에 정통했던 드문 사례로, 후대에 많은 예술 창작의 모티프가 되었습니다.

3. 향수(鄕愁)와 비극성

• 아베노 나카마로가 남긴 와카 한 수(「天の原 ふりさけ見れば…」)는, 그가 일본 땅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실감하게 해주며,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 오랜 세월 명시(名詩)로 전해져 왔습니다.
• ‘끝내 돌아갈 수 없었던 귀국의 꿈’이라는 비극성이 일본 문학사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서 큰 공감을 얻어, 수많은 설화와 전설을 낳았습니다.

4. 사후 일본 조정의 대응

• 『続日本紀』에 따르면,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가족이 궁핍해 장례조차 힘들어하자, 일본 정부는 유족에게 비단·포목을 보내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 이는 일본 조정이 그를 ‘역신’으로만 여기지 않았으며, 당대 최고 인재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예우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맺음말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는 8세기 동아시아 국제무대에서 활약했던 ‘국제인(國際人)’이자 문학자였습니다. 비록 일본을 떠난 뒤 일생을 타국인 당에서 보내며, 여러 차례 귀국을 시도하고도 실패하여 결국 고향 땅을 밟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시가와 전설들은 오히려 이러한 비극적 운명에 낭만성과 신비로움을 더해주었습니다. 당대 최고 수준의 시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문예적 역량을 떨쳤다는 점, 안남절도사 등 고위 관직을 거치며 행정·정치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동시기 고선지, 혜초 같은 외국 출신 당 관료 혹은 승려들과 더불어 ‘당나라의 국제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일본 내부에서는 그가 남긴 유명 와카를 통해, 오늘날까지도 “하늘을 우러러보니, 고향 미카사 산에 떠오르는 그 달이여…”라는 향수의 정취가 깊게 전해집니다. 살아서 귀국하길 바라던 그의 염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천 년을 넘은 세월 동안 시가(詩歌)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며, 동아시아 문화교류사의 한 갈피를 빛나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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